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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문화재 간제온지(절)·가이단인(절)

[국가 사적]
간제온지(절) 경내 및 자원(子院) 유적과 로지 기와가마 유적
[국가 중요문화재]
(조각)
[후쿠오카현 유형문화재]
(건조물·공예)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斉明天皇)을 추선하기 위해 텐지 천황(天智天皇)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원입니다. 주변에 49개의 자원(子院-작은 사원)이 있었다고 하며, 가람(伽藍)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초석 등이 남아 고대의 번영을 보여줍니다. 이 절은 대륙에서 유래된 무악을 연주하는 악단을 갖추고 있으며 능왕(陵王), 나소리(納曽利)의 탈(국가 중요문화재)이 현존합니다. 또한, 낙경법요(落慶法要-사찰의 건축공사가 낙성된 기쁨을 축하하는 의례)를 행한 승려 겐보(玄昉)의 무덤이 남아있습니다.
가이단인(절)에는 계단(戒壇-승려가 계율을 받는 단)이 전해지고 있는데, 간진(鑑真)과 구카이(空海) 승려가 이 절에 머무르며 처음으로 수계를 베푼곳으로, 천하의 삼계단(天下三戒壇)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치된 16채의 불상(국가 중요문화재)은 헤이안~가마쿠라 시대(794~1333년)의 세련된 조상(造像)으로 불교문화가 계속해서 전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도 이곳 간제온지(금당과 강당은 후쿠오카현 유형문화재)와 가이단인(본당, 종루, 종은 후쿠오카현 유형문화재)에서 법등(法灯)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간제온지(観世音寺)

간제온지(観世音寺)

 660년에 멸망한 백제의 부흥을 위해 떠난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 츠쿠시(후쿠오카)에서 서거하셨습니다. 그분을 공양하기 위해 아들인 덴지 천황이 발원한 사원이 간제온지입니다.
 완성하는데 80년여의 세월이 흘러 746년에 가람(伽藍-승려가 불도를 닦는 곳)이 완성되어 공양을 드렸습니다. 761년에는 스님에게 수계를 하는 가이단인(戒壇院)도 마련되었습니다.
 ​간제온지는 ‘후노다이지부(다자이후에서 가장 큰 사원)’ 이라고 불리며, 규슈 불교사원의 정점이 되는 대사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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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제온지(観世音寺) 보물고

    간제온지(観世音寺) 보물고

     경내의 동쪽에 있는 고대 창고를 모방하여 지어진 수장고입니다.
    여기에는 높이 5m의 조상(彫像)을 비롯해 간제온지(観世音寺)에 전해 내려온 수많은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조상은 계단을 올라가면 거의 정면에 있는 ‘도발 비사문천 상(兜跋毘沙門天像)’입니다.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의 서역 나라 도발국에 나타난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 하며, 국토를 지키는 부처라고 합니다. 이것과 같은 종류의 불상이 교토 헤이안쿄 주작대로의 남쪽에 있던 라조몬 (羅城門,교토에 들어가는 정문)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조상도 원래 고대도시 다자이후 조방의‘라조몬’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사원의 창건 기와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꽃의 꽃 주위에 톱니무늬(鋸歯文, 거치문-삼각형을 가로로 반복한 무늬)로 둘러싼 디자인은 나라 아스카(奈良県 明日香村)의 가와라데라(川原寺,아스카 시대 사찰 중 하나)와 후지와라 궁(694〜710년 궁전) 등 7 세기말의 천황과 관련이 있는 시설에 사용된 기와와 비슷합니다.

     간제온지에는 중국에서 기원한 “기악(중국 오(吳)나라의 무악)” 악단이 놓여있었습니다. 686년 “신라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가와라데라(川原寺)의 기악을 츠쿠시에 날랐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간제온지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 905년 사원 기록에는 신구(新旧) 각각의 기악 용구의 상태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 전통을 잇는 “무악면(舞楽面)”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국가 중요 문화재).

     이 밖에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하는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간 벽돌과 중국의 송나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자상 (국가 중요 문화재) 등 국내외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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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제온지 범종 간제온지 범종1

간제온지 범종

 간제온지 종탑(鐘楼)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입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한시 「불출문(不出門)」에서 읊은 바로 그 종입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소리는 고대에 울려 퍼진 것과 같습니다.

(이 범종은 현재 규슈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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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단인

가이단인

 승려가 지켜야 할 규범이나 규칙을 ‘계율’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받는 의식을 통해, 승니(僧尼)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계율은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온 승려 간진(鑑真)에 의해 전해졌습니다. 간진은 도중에 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6번째 도항(渡航)으로 간신히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도성으로 향하는 도중, 간제온지를 방문해 753년 12월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계율을 주었습니다.
 761년에는 간제온지의 가이단인이 규슈에서 수계(授戒)의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도다이지(나라현), 시모노 야쿠시지(도치기현)의 가이단인과 함께 ‘천하의 삼계단’이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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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

     가이단인(戒壇院)은 905년의 기록 및 고대 그림에 의하면 동서로 긴 사당 두 채가 줄지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1148년의 기록에는 가이단인의 기둥 사이는 5간(間)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가이단인은 쇠퇴하고 1668년에 선종사원으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의 본당은 1680년에 재건된 것으로 여기지는 선종(禅宗)식 건물입니다.

     본존은 나라(奈良)의 도다이지 대불(東大寺大仏)과 같은, 노사나불(盧舎那仏)입니다 (국가 중요 문화재). 12세기의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양쪽 옆에는 문수 보살상(文殊菩薩像)(우측), 미륵 보살상(弥勒菩薩像)(좌측)이 서 있습니다. (다자이후시 지정 문화재). 모두 에도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교토의 불사(仏師)에 의해 제작된 후, 이곳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무렵, 범종(후쿠오카현 지정 문화재), 간진상(鑑真像) (다자이후시 지정 문화재), 간제온지와 관계가 있는 구카이상(空海像) 등도 제작되었습니다.

     중앙의 단(段)이 수계(受戒)의 장소로 사용된「가이단(戒壇)」 입니다. 여기에 천축(인도), 당나라 (중국), 나라(일본)의 흙을 바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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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겐보(玄昉)의 무덤

승려 겐보(玄昉)의 무덤

 간제온지 경내의 북서쪽에, 승려 겐보(玄昉)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석탑이 있습니다.
 겐보(玄昉-현방)는 당나라로 건너가 18년간 지내면서, 현종 황제에게 인정을 받아, 보라색 가사(袈裟-승려가 있는 옷)를 하사받은 승려입니다. 그는 735년에 귀국하여 정권을 맡게 되지만, 일부 사람들의 반감도 샀습니다. 그들을 배제시킬 것을 요구하며 다자이후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는 붙잡혀 죽임을 당합니다.
 745년 겐보는 간제온지 조영(造営) 책임자로 좌천되어, 다음 해에 완성하여 공양을 하지만, 그 날에 급사하게 됩니다. 역사서에서는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영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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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겐보(玄昉)의 무덤

    겐보(玄昉)의 무덤

     겐보(玄昉)는 그들이 조정(朝廷)에서 배척될 것을 호소하며 다자이후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사망한,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의 영(霊)에 의해 살해됐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746년 간제온지의 가람이 완성되서 겐보(玄昉)가 공양을 드리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이 솟아 오르고 천둥 소리와 함께 겐보(玄昉)는 하늘높이 끌어 올려졌습니다. 그후 몸통은 간제온지에, 목은 나라(奈良) 헤이조쿄(平城京)의 고후쿠지(興福寺)에 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이곳은 “겐보노 도츠카(玄昉의 胴塚,겐보의 몸 무덤)”라고 불립니다.
     무덤에는 14세기 경 석탑(보협인탑-宝篋印塔)이 세워져 있습니다. 중세 다자이후의 석조 문화를 전하는 문화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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